11월로 들어서니 멀리 잔칫집에 갔다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막 집에 들어선 느낌입니다
아마도 10월내내 현란했던 낙엽들을 따라 눈과 귀가
온통 밖으로만 향했었던 까닭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문을 열고 들어선 집안에서 오직
먼지낀 창틀과 텅빈 냉장고만이 나를 반기듯
차분히 안으로 시선을 돌리니 휑한 마음만 가득합니다.
손이 닿는곳마다 책들을 놓아두고 오며가며 읽어야겠다 마음먹고
잡은 책이 빈센트 반 고흐의 <영혼의 편지> 입니다
참고로 이곳에서는 책 한번 사면 꼭 재탕해야 원가대비 타산이 맞는데
이 책은 나도 가끔은 산다는것이 개콘의 소고기형님처럼
"소고기 사 먹으면 뭐하겠노~" 싶어질때 드문드문 읽는 책입니다
원가 대비 수지타산이 괜찮은 <영혼의 편지> 그리고 고흐,
회색빛의 거리와 낮게 내려앉은 11월의 하늘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영혼의 편지>는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668통의 편지들을 모아 만든 책입니다
고흐의 작품들을 보면 우리는 그가 위대한 천재화가임을 알 수 있듯
책속에서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의 고흐를 만날수 있습니다
위대한 화가가 되기위해 그가 고뇌한것은 무엇이며
아들로서. 남자로서 이루지 못한 평범한 삶에 대한 애절함과 함께
고흐가 이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 살다간 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자살로 끝을 낸 그의 짧은 생때문만은 아닌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새장에 갇힌새*
1872년 8월~1881년 4월 화가 입문이전부터 보리나주까지
1853년 네덜란드에서 엄격하고 보수적인 칼뱅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숙부 세사람이 모두 화상인 덕에 1869년 7월부터 구필화랑의 수습사원으로 일하게 된다
1873년 화랑 런던지점으로 옮기게 되었고 하숙집딸 유제니 로이어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한다
1875년 파리본점으로 다시 옮기게 되었고 이때 성서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종교에 몰입하게된 이후 미술품거래일을 혐오하였고 1876년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이후 무보수 견습교사, 서점점원으로 전전하게 되었고 신학을 하려고
암스테르담으로 갔으나 신에 대한 이론적 학습과 실제로 복음을 전파하려는 갈망사이에서 방황한다
1878년 전도사가 되어 벨기에의 탄광지역인 보리나주로 갔지만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고
테오의 경제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이때부터 전업화가의 길로 나서게 된다
*사랑없이는 살수 없다*
1881년 4월~1881년 12월 에텐에서
1881년 4월 부모가 있는 에텐으로 돌아와 모델을 두고 인물뎃생에 몰두했다
그해 여름 사촌 케이에게 구혼을 했지만 케이에게 거부를 당하고
그 거절감은 고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가족들과 친척들 사이에 갈들을 겪게된다
그해 겨울 고흐는 에텐을 떠나 수채화와 유화를 배우기 위해 헤이그로 떠난다
*조용한 싸움*
1881년 12월~ 1883년 9월 헤이그에서
1882년 2월 화가인 모베의 도움으로 헤이그에 아틀리에를 얻고
밀레의 전기를 읽고 갚은 감명을 받아 밀레와 같은 농촌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다
하지만 이때 고흐는 가족들과의 불화와 케이의거절로 지독한 좌절감과 외로움에 빠져있을때
임신한 거리의 여자 시엔을 만나게 된다 그 일로 많은 화가들과 관계를 끊게 되자
혼자 작업을 하며 처음으로 수채화나 유화를 그리게 된다
*화가는 캠퍼스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1883년 9월~ 1885년 11월드렌테, 누에덴에서
1883년 9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시엔과 헤어지고 드렌테로 간다
그곳의 풍경은 마음에 들었지만 열악한 작업환경과
여전히 어려운 경제로 부모가 있는 에덴으로 돌아간다
목사관 창고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독서와 그림에 열중한다
그해 여름 열살 연상의 마르고트와 결혼을 생각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간다
1885년 3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월말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린다
*생명이 깃든 색채*
1885년 11월~ 1888년 2월 앤트워프, 파리에서
1885년 11월 고흐는 도시풍경과 초상화를 그려
생게를 유지하려는 희망을 품고 엔트워프로 떠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신경과민 증세가 심해져 2월이 끝나기전에 그곳을 떠나 파리로 간다
파리에 온 고흐는 탕기영감이 운영하던 그림물감 상점에서
로트렉, 베르나르,러셀등을 만나고 인상주의 회화의 의미를 알게 된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로 인해 건강이 나빠졌으나
그들로 인해 고흐의 화풍에는 변화가 생겼다
탬버랭이라는 술집의 주인이며
이탈리아화가의 모델이었던 세가토리와 잠깐 만나기도 했다
1885년 6월 벵 화랑에서 열린 일본그림에 강한 인상을 받아
그 이후 고흐 그림의 색채는 원색의 사용으로 밝아지기 시작한다
11월에는 전시회도 열었는데 그로 인해 고갱, 쇠라, 기요맹등을 알게 된다
파리에 온지 1년 6개월이 지나자 도시에 염증을 느끼고
더 많은 빛과 색을 찾아 남프랑스 아를로 떠난다
*내 영혼을 주겠다*
1888년 2월~ 1889년 5월 아를에서
1888년 2월 20일 고흐는 눈 내린 아를에 도착한다
3월말, 처음으로 파리 살롱전에 그림을 전시하기도 한다
화가공동체를 꿈꾸던 고흐는 노란집을 아틀리에로 꾸며
고갱과 공동생활을 시작하지만 두 사람의 견해차이로
불화가 심해지자 12월 23일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간이 일어난다
고갱은 급히 파리로 떠나고 고흐는2주동안 병원에 입원한다
1889년 1월 다시 노란집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환각증상이 나타나고
동네주민들의 고발로 3월말까지 강제 입원된다
4월 17일 동생 테오가 암스테르담에서 결혼한다
아를시절에 고흐는 200여점의 작품을 남긴다
*고통은 광기보다 강하다*
1889년 5월~ 1890년 5월 생 레미에서
1889년 5월 생 레미에 있는 요양원에 들어간다
9월에는 <별이 빛나는밤>과 <붓꽃> 두 점이 파리 앙데팡당전에 출품되고
동료사이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좋은 평가를 받게 된다
하지만 그즈음 계속된 발작으로 갑자기
빨간튜브 물감을 빨아먹기도 하며 심한 고통을 겪기도 한다
1890년 1월, 브뤼셀의20인전에 유화6점이 전시되고 권위 있는 평론가로부터
지극히 호의적인 평론<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프랑스 신문에 실리기도 한다
한편 브뤼셀의 20인전에 출품했던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렸는데
이것은 고흐 살아생전에 팔린 유일한 작품이 되었다
생레미 요양원 생활을 견디지 못한 고흐는 1890년 5월 파리로 갔으나
머물지 못하고 다시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간다
거기에는 피사로와 세잔의 친구 닥터 가쉐가 있었다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수 있는 사람*
1890년 5월21일~ 7월 29일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긴 고흐는 라부여인숙에 방을 얻고
닥터 가쉐의 치료를 받는다
6월말 테오를 만나러 파리에 갔다가 돈 문제로 말다툼을 하게되고
그헤 7월 27일 가슴에 스스로 총을 쏘고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이 모든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라는 말과함께
지상에서의 파란 가득한 삶을 마감했다
<붉은 포도밭> 1888년 11월- 살아생전에 팔린 단 하나의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년 7월 -공식적으로 고흐의 마지막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해 뜰무렵 밀밭에서 수확하는 사람> 1889년 9월초
테오에게****
요즈음은 아프기 며칠전에 시작한 그림 <수확하는 사람>을
완성하느라 전력을 다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노란색을 띄는
이 그림은 색을 두껍게 칠했는데 소재는 아름답고 단순하다
수확하느라 뙤약볕에서 온 힘을 다해 일하고 있는흐릿한 인물에서
나는 죽음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건 그가 베어 들이는 밀이 인류인지도 모른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이 죽음속에 슬픔은 없다
태양이 모든것을순수한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환한 대낮에
발생한 죽음이기 때문이다.........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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