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금은 버려야 할때

오후화실 2012. 5. 30. 22:40

 

 

에곤쉴레 (Egon Schiele) Little Tree 1912년

 

 

한 자리에서 오래 살다보면 묵은 짐들이 쌓이기 마련입니다

필요해서 쓰는 것보다 끌어안고 사는 짐이 더 많아 보입니다

 

밥 해먹고 잠 자는곳만 빼꼼히 치우고 살다가 나름 대청소 한번 하고 나면 생기는,

버리자니 아깝고 가지고 있자니 별 쓸모는 없어 보이는 애매모호한 짐들은  일단 지하실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한 자리에서 9년쯤 보내고 나니 지하실은 보물(?)창고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다 아이들이 한번 지하실에 내려가면 한 나절은 올라오지 않고 웃음소리만 들려 옵니다

아마 자기네 어린시절을 만나고 있는 것이겠지요

어렸을때 입던 옷가지, 유치원때 썻던 일기, 그림 ,등등

 

발아래 지하실인데도 일년에 한번 명절에 시댁가듯(그러면 안되죠)  한번씩 내려가면 머리가 무겁습니다

그리고는 다짐을 합니다" 언젠가는 꼭 치우고 말거야 치토스~" ^-^ 그 언젠가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아는 분이 그러시더군요 대대적으로 정리가 필요하면 이사를 한번 해 보라고 ㅋㅋㅋ

 

 

며칠전 우연히 옛날에 쓰던 커텐이 필요한 일이 생겨

커텐 찾으러 지하실에 내려갔다가 나도 그만 보물찾기 놀이에 빠져 버렸습니다

 

커텐이 있을만한 박스를 열어보니 박스안에서

풀지도 않은 채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이민짐이 나왔습니다

그 옆으로 나란히 있는 서너개의 박스도 이민짐일거라는 확신이 왔습니다

반가움이 밀려오고, 우리가 이민오던때의 기억이 밀려오고 남편과 나의 젊은 날이 밀려왔습니다

사실 풀지 못한 박스안에 있는 물건들은 거의 남편의 전공서적과 내가 보던 책 몇권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이민을 올 수 있었던것은 오직 남편의 커리어만 믿고 떠난 독립이민이었기에

그것을 지탱해줄 책은 우리 이민짐중 가장 귀중한것이었습니다

캐나다에 도착하고 나서 그건 우리의 꿈이었다는것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요

"그래도 언젠가는 써 먹지 않을까?"하고 이사할때마다 소중히 싸 안고 다니던것이

이 집으로 마지막 이사오기전 9년전 입니다

 

풀지도 못하고 이삿짐에 고이 끌고 다니던 책들이

정말 언젠가는 써 먹을 날이 올거라고  믿고 있었을까요

점점 희망이 사라져가고 이 땅에서 우리들의 존재가치가 너무 미미하디고 느낄때

그 책들은 잃어버린 우리들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의미로만 그 역활을 했다는것이 솔직한 표현일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책들이 지하실에서 조용히 잠자고 있다는것을

잊은 순간 우리들은 열심히 잘 살아온것 같습니다

 

날씨도 좋고  우리들 마음도 좋고 하는날에  남편과 책정리를 해야겠습니다

이사를 가지 않아도 때에 맞추어 과감히 버릴건 버려야 한다는것이 나의 지론입니다 ^^

 

아이들은 지하실을 내려가면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는데

버려야겠다 하고 생각하다보니 마음 한구석에 살짝 뭔가가 고여 옵니다

"왜 잘 살아왔잖아 남의 땅에서 아이들 키우고 , 또 음~ 안 굶고~ 또~ ............아 그러면 됐지"

생각해 보면 이것이 꼭 이민의 삶이어서라기 보다는 인간의 삶이 아닐까 싶네요

아니면 "내 청춘 돌리도'하는 나이먹은 아줌씨의 넋두리 뭐 그런거 일까요 ......-_-

 

어떤이라서 뒤돌아 본 삶중에 후회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을까요

어디서 살건 사느것은 마찬가지일텐데 오지 않을 어떤 허상에 사로잡혀

가끔은 주어진 내 시간들을 유기했던점들이 진한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제는 불필요한 짐도 버리고 미련도 버리고

그리고  열 두번만 더 내려가면

정리가 되어질것들이 대충 정리가 될것 같습니다

마음도 주변도 가벼워지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