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오후화실 2012. 5. 18. 11:01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9세기말 20세기초 유럽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에로티시즘의 화가

 

                                                                                                                           2006년  <영화포스터>

클림트의 생애는~

 

1862년 7월 오스트리아 수도 빈근교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클림트는

보헤미아출신의 금세공자이자 동판조각가인 아버지의 수공예품을 보며 자라났다

빈곤했던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술례"라는 직업을 가지는 학교에 가야했다

1876년 그의 나이 14살되던해 그이 데생실력을 눈여겨 보던 친척이 비엔나장식미술학교를

보내줌으로 클림트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학교에서 만난 동급생 프란츠 마치와 동생 에른스트와 함께 교회창문 디자인, 건물의 벽화를

그리며 미술학교를 졸업할때에는 이미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1892년 갑작스런 동생 에른스트가 사망하고 그 이후 클림트의 그림속에서

삶과 죽음은 늘 등장하는 소재가 되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많은 모델들과의 염문으로 14명의 사생아를 남겼다 

다혈질의 소유자였으며 살아 생전에 명성을 누렸고 주변 사람들애게도 존경을 받았다

1918년 1월 그의나이 56세에 뇌일혈 발작으로 반신불수가 되었으나 조금 차도를 보일무렵

스페인 독감이 폐렴으로 되어 2월 6일 아침6시 숨을 거두고 만다

"60까지는 살고싶다"라는 말을  평소에 습관처럼 말했다고 한다

 

클림트의 작품세계는~

 

젊은시절 클림트는 보수주의자들에게 환영받는 화가로,

고대 고전기 미술을 표방하는 19세기 후반의 전형적인 아카데미 화풍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정신의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이론이나 작가 무질, 호프만스탈의 작품과 함께

상징의 몽환적 세계를 향한 문을 열던 세기말 비엔나의 분위기속에서

그의 그림은 아르누보 양식의 우아함과 추상과 구상의 통합,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색채와 시공을 초월한듯한 구성으로 바뀌게 된다

1897년 인상주의화풍을 거부하는 미술협회의 진부한 사상에 반대하여 클림트의 주도아래

진보적인 미술가들이 모여 결성된 모임이생겼다

분리파라고(Secessionist)하며 클림트를 비엔나분리파의 창시자라고 부른다

1903년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의 초기 기독교 모자이크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라벤나성의 비잔틴양식예술은 클림트 "황금빛 양식"에 영향을 미쳤다

그 이후 캔버스위에 금을 칠한 이른바 클림트의 "황금시대"가 시작된다 

황금시대를 끝난이후에는 주로 여름휴양지었던 아테제해변과 별장주변을 그리며

클림트 미술의 25%를 차지하는 풍경화를 남겼다

 

 

아델 블로흐 바우어부인 Frau Adle bloch Bauer -1907년 Oil and gold

 

2006년 경매최고가였던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의 기록을 뛰어 넘은

클림트의 <애델 블로흐 바우어 부인>이다

경매가는1억3천5백만달러(한화 약 1800억원정도)

 

 

 입맞춤 -The Kiss-1907년 벨베데레 궁전안 오스트리아미술관 소장

 

화가인 클림트를 몰라도 어디선가 한번은 본 그림이다

오랜 연인관게를 유지해온 에델 블로흐 바우어부인이 모델이다

이 그림을 끝으로 클림트의 황금시대는 끝이 난다. 더 이상 금을 사용하지 않는다

-The kiss-는 전시를 위해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의 세 시기(The Three Ages of Woman)1905년 로마국립갤러리

1911년 <로마국제미술전 금상>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던 누이와 어머니의 죽음으로 여자의 일생을 그려낸 그림이다

인간의,여자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엄마의 품에 안긴아기와 아기를 안고있는 엄마의 표정에서

젊음,희망,사랑,이런것들이 보이지만 옆에선 늙은여자의 옆모습에서

늙음, 어두움,절망,어떤것으로부터 소외당한 슬픔이 보인다

그것은 반복되어지고 우리는 그것은 삶이라고 한다

 

 

 

                   희망 Hope11 1907~8년 oil and gold on canvas  뉴욕 현대 미술관

 

                                                 아이를 가진 임산부 배위에 해골이 있다

                            아마도 인간이 피해갈수 없는 생과 사의 윤회고리의 표현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는 태어난 아기도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을 클림트는 말하고자 했을것이다

 

 

 

프리차 리들러부인 Portrait Of Fritsa Reidler 1906

 

                                                                  클림트 대표작중 하나

 

 

                                             죽음과 삶 Death and Life 1916 개인소장 비엔나

                                            로마국제미술전에서 일등상수상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말세 비관주의가 휩쓸고 있었다

                 1908년에는 지진으로 8만명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1912년에는 타이타닉호의 침몰사건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삶에 다한 공포를 느끼던 때였다

 

 

유디트1 (Judith) 1901년 벨베데레궁전 비엔나

 

클림트의 유디트는 1908년에 그린 유디트II와 함께  클림트의 에로틱하고  관능적인 표현이 두드러진 그림이다

그림 하단에 남자의 잘린목을 들고 있는 클림트의 유디트는 남성을 지배하는 욕망의 화신의 모습이다

1900년대 유디트는 누구인가? 유디트는 구약성경 외경에 나오는 아름다운 과부의 이름이다

이스라엘의 도시 베툴리아에 어느날 앗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가 쳐 들어온다

유디트는침략당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홀로페르네스에게 접근해서 그의 목을 벤다

클림트의 그림밖에서 유디트는 나라를 구한 용감한 영웅이다

유디트의 이여기는 많은 화가들의  그림소재가 되었다

 

 

카라바조-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98년

 

클림트의 유디트가 1905년 배를린에서 열린 독일 예술가연맹 2차 전시회에서

<살로메>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살로메 역시 성경속의 인물이다

한가지 청을 들어주겠다는 헤롯왕에게 세례요한의 목을 원했던 살로메.

유디트가 가졌던 홀로페르네스의목은 나라를 구한것이었지만

살로메가 원한 요한의 목은 개인의 욕망에 의한것이었다

 

에밀리 플뢰게 Portrait of Emilie Floge 1902

 

 

에밀리 플뢰게 는 평생동안  클림트와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눈관계이다

그림속의 모델이었던 에델 블로흐 바우어부인이나그의 사생아를 낳았던 모델 마리아 짐머만등

많은 여자가 있었지만 죽을때에 클림트가 찾은 사람은 에밀리 플뢰게였다고 한다

 

 

Beech Forest 1901 

 

 

 2012년은 클림트 탄생 150주년의 해이다<1862년~2012년>

올해는 비엔나 어디를 가도 클림트를 만날수 있다

비엔나에게 클림트는" 세상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관능적이며 비싸고 아름다운 작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세계 미술계의 오랜 변방이던 빈에 동시대적이고 세련된 모더니즘을 안겨준 이가 클림트이다

파리에서는 1866년 모네의 <풀밭위의 식사>같은 문제작과

대규모 일본판화전시회등 새로운 바람이 부는데 빈의 화가들은 지루하고 권태로운 화풍을 이어같다

클림트가 빈분리파를 창설할때 이런말을 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뒤덮어 버리자"